[여의도풍향계]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당헌 개정 '몸살'
[앵커]
여의도 정치권이 때아닌 당헌·당규 시비로 시끄럽습니다.
여야 모두 당헌 개정이나 개정 시도를 둘러싼 설왕설래에 휩싸인 것인데요.
그 의미와 여파를 최지숙 기자가 여의도 풍향계에서 짚어봤습니다.
[기자]
'국가 통치 체제의 기초에 관한 근본 법규의 총체', 바로 헌법의 정의인데요.
국가에 최고 법규인 헌법이 있다면, 정당에는 '당헌'이 있습니다.
우리 사전에선 '정당에서 내부적으로 정한 강령이나 기본 방침'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요.
당의 존립 목적과 운영에 관한 근본을 담고 있으니 쉽게 흔들지 않는 것이 원칙일텐데, 어찌 된 일인지 수시로 개정 시도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여당인 국민의힘에선 당헌 개정을 통한 비상대책위원회 출범 문제가 법정으로 갔습니다.
비대위 공식 출범으로 자동 해임된 이준석 전 대표가 법원에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것인데요.
"절차적으로 잘못된 부분과 당내 민주주의가 훼손된 부분에 대해 재판장님께 드릴 수 있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비대위 출범 요건인 '비상 상황'에 대한 해석, 사퇴를 선언한 최고위원들의 의결 참여 그리고 당헌·당규 졸속 개정 등이 주요 쟁점입니다.
당 전국위원회는 지난 9일 자동응답전화, ARS 투표로 당헌 제96조를 개정했습니다.
"찬성 457명, 반대 52명으로 당헌 제13조, 제19조 및 제91조에 의거해 당헌 개정안이 원안대로 가결됐음을 선포합니다.""
비상대책위원장 임명권자에 당대표와 당대표 권한대행 외에, 당대표 직무대행을 포함시키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권성동 당시 대표 직무대행이 비대위원장을 임명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국민의힘은 절차적 하자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이 전 대표는 "한 사람을 몰아내기 위해 당헌·당규까지 누더기로 만들었다"고 비판했고, 이제 그 판단은 법원으로 넘어간 상태입니다.
전당대회를 앞둔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당헌 80조 개정을 놓고 극렬한 갈등에 휩싸였습니다.
'이재명 사당화' 논란에 직면한 것인데 그 이유를 좀 들여다보겠습니다.
민주당의 당헌 제80조 1항은 '부정부패 혐의로 당직자가 기소되면 직무를 정지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 전당대회준비위원회는 지난 16일, '기소 시 당직 정지' 조항을 '하급심 유죄 선고 시'로 바꾸는 안을 의결했습니다.
"전준위에서는 하급심에서 금고 이상의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 직무 정지가 될 수 있게끔 하고요."
부정부패 혐의로 재판을 받아도 당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얘기인데, 이 때문에 검찰 수사를 받는 이 의원의 '방탄용'이라는 지적이 제기됐습니다.
따가운 여론이 더해지며 결국 민주당 당무위는 해당 당헌을 유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부정부패 개선과 척결 의지는 그대로 보존하고 다만 정치적 탄압이나 부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 당무위에서 달리 결정할 수 있다는…"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리다'는 식의 당헌 개정 시도는 여야 할 것 없이 과거에도 이어져 왔습니다.
내세운 명분은 달랐지만, 선거 승리나 당대표 권한 강화 등 결국 정치적 이익을 위한 셈법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민주당은 2년 전, 2020년에도 임의적인 당헌 개정으로 여론의 질책을 받았습니다.
당시 민주당 당헌에는 '당 소속 공직자가 중대 잘못으로 직위를 상실해 재보선을 실시할 경우, 해당 선거구에 후보자를 내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었는데요.
무공천 약속을 저버리고 당헌을 고쳐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오거돈 전 부산시장 자리에 후보를 낸 것입니다.
"후보자를 내지 않는 것만이 책임있는 선택은 아니며 오히려 후보 공천을 통해 시민의 심판을 받는 것이 책임있는 공당의 도리라는…"
결과는 참패, 이 전 대표의 말처럼 준엄한 심판이 따랐습니다.
보수 진영에선 당헌 개정이 당내 진영 논리와 맞물려 입길에 올랐습니다.
2011년 홍준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재창당 로드맵으로 당헌·당규 개정을 제안하자 이정현 의원을 비롯한 '친박근혜'계 의원들은 냉담한 반응을 쏟아냈지만, 이후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5년 뒤, 이정현 당시 새누리당 대표는 대선주자도 당대표가 될 수 있도록 당헌을 개정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비박계가 요구한 비대위 구성 대신 조기 전당대회 카드를 꺼낸 것인데
"당이 새롭게 국민에게 거듭나기 위한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는 전당대회를 개최하기로 한 제 취지와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당내 일각에선 '최순실 사태'로 친박계가 수세에 몰리자 총대를 멘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이유로 당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당헌은 수시로 뜯어 고쳐졌습니다.
언뜻 국민의 삶과는 동떨어진 문제처럼 보이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른 당헌의 차이는 대의 민주주의에서 국민의 선택지를 늘리기도, 좁히기도 했습니다.
'랍비'는 유대인들이 존경받을 만한 인물을 일컫는 말로 '나의 스승'이라는 뜻인데요.
탈무드 잠언집에는 '산양이 수염을 기른다고 랍비가 될 수는 없다'는 격언이 나옵니다.
외피를 바꿔도 속이 다르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변화가 없다면, 거듭된 당헌 개정과 이를 부연하는 각종 수사(修辭)에도 민심에 다가서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여의도 풍향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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